조국 전쟁 이후의 국내정책
- 건강
- 2019. 3. 6. 14:25
국내 정책 과정의 반동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그가 꿈꾸던 개혁을 지속할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사회의 기대는 황제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보적 성향의 귀족들은 미래의 헌법제도에 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제도의 폐지를 희망했고 제국의 민중들은 민족정책의 관용을 희망했습니다. 차르는 물론 이러한 상황과 기대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상황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보수적 성향의 귀족들은 파리 부르주아들의 패배와 유럽에서의 봉건정권의 복귀를 국내 정책에서 전혀 다른 변화의 신호로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수행된 개혁의 거부에 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렉산드르는 개혁을 성취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고 엄중한 비밀 속에서 개혁안을 입안해야만 했습니다.
발트해 연안에서 농노제도의 폐지 이후에 황제는 자신의 측근들 중에 한 사람인 아락체예프 장군에게 전 러시아 농민 개혁안을 입안할 것을 위임했습니다. 곧 그런 개혁안이 준비되었는데 개혁안에 따라 찬성한 지주들에게서 소유지를 구매하였고 매년 5만 루블의 할당이 제안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입한 땅들은 햅ㅇ된 농민들에게 한 농민당 2데샤티니씩 나누어 주도록 제안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헌법과 국내정책 노선의 교체
폴란드 헌법이 채택된 이후에 차르는 노보실체프에게 전 러시아의 헌법안을 입안하도록 위임했습니다. 1820년대 이 초안은 준비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규약문이라고 불렀습니다. 헌법초안의 기본 취지는 인민주권이 아니라 황제권력의 주권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양원제 의회의 설립이 제안되었으며 의회의 동의 없이는 황제는 하나의 법도 발령할 수 없었습니다. 법안을 제안할 권리가 차르에게 부여되었는데 차르는 권력의 수장이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언론과 신앙의 자유가 부여되고 법앞에 평등 인권의 불가침성, 사유재산권의 보장 등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헌법초안의 시민 개념에는 자유민 계층의 대표자들만이 포함되었고 농노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헌법 초안은 러시아의 연방제 도입과 러시아를 지방자치 행정기구로의 분할을 계획했습니다. 각 지방행정 조직에는 양원제 의회의 설립이 제안되었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예전처럼 여전히 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은 처음으로 법에 의해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헌법 초안은 차르의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차르의 개혁안은 대다수 귀족들의 적극적인 반대를 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의 슬픔경험처럼 차르는 이것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러시아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유럽의 혁명적 사건들이 증대를 불안하게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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