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 러시아의 사회 경제 발전

산업혁명의 시작

19세기 초 무렵 러시아 농노제 경제는 해체의 시대를 겪었습니다. 19세기 초에 많은 전쟁에 참전과 대륙 봉쇄령은 러시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조국 전쟁 이후의 상황은 더욱더 복잡했습니다. 조국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재정적 손실은 거의 6억 루블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공장 생산에서 기술 혁신을 성취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세계 강대국들과의 기술적 경제적 격차는 증대되었습니다. 러시아를 위한 당면 과제로 농노제도의 개혁 뿐만 아니라 산업의 기술적 혁신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1830~1840년대에 러시아에서는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러시아의 산업혁명은 농노제도가 유지된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산업혁명은 러시아에서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고 세기말에 완성되었습니다. 농노제도의 폐지 이전에 산업혁명은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나타나 기계생산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동시에 산업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같은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과 부단한 증가는 어렵게 진행되었고 본질적으로 더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통치 말에 러시아에는 8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1만 4천개 이상의 산업기업들이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은 1850년대 말에 이미 1600백만 베레텐 출력의 증기기관이 가동되었던 면방직공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금업에서는 압연기계의 등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초로 베시머 제강법을 적용한 금속축출이 실현되었습니다.


지주들과 농민 경제

산업과 달리 농촌 경제는 과거와 같이 천천히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지주들과 농민들도 공산품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필수품을 사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팔아야 했습니다. 한편 보존된 농노제 노동의 주도와 후진 기술 때문에 지주들의 생산성과 수입은 낮았습니다. 지주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경제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외국 기계들을 주문했고, 새로운 경작법을 도입했으며 체격이 좋은 순종의 가축을 길렀습니다. 몇몇의 현에서 지주들은 자유롭게 고용된 노동력의 이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노동력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혁신들은 전 지방의 발전으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대부분의 지주들은 예전처럼 소작료와 부역 노동을 증대시켜서 수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많은 농노들이 노동 부역 대신에 소작료의 지불함으로써 농업의 쇠퇴를 초래했습니다. 농촌 주민의 거의 절반이 말과 밭이 없고 매우 가난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지주들의 부채를 증대시켰습니다. 1844년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을 54% 저당 잡혔습니다. 


농촌에 스며든 상품과 화폐의 관계는 생산증대를 위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농민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수의 비천하고 가난한 계층과 함께 무역과 산업생산에 자금을 투자하는 고리 대금업에 종사하는 자본가 계층이 증가했습니다. 몸값을 치루고 자유를 획득하며 자신의 공장을 세운 대 사업가들이 부유한 농민들 중에서 나왔습니다. 모로조프가 , 프로호로프가, 가릴린가의 기업가 가문이 생생한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재정과 무역

1823년 칸 크린이 재무대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국가재정의 긴축 문제에 대해서 비타협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고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칸 크린은 국내 산업과 무역의 발전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지출에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반대했습니다. 예를 들어 철도건설이 러시아 경제에 이득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철도건설에 반대했습니다. 


1839년~1843년 기간에 재임한 재무대신은 은 본위의 루불을 중요한 지불 수단으로 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화폐제도를 강화했습니다. 국가의 재정은 아주 튼튼해졌고 이 기간에 시작된 시베리아에서의 금 채취는 1831년에 45푸트에서 1850년에는 1296푸트로 증가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의 금 채취는  세계 생산량의 약 40%로 세계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러한 기간에 러시아 무역의 발전에서도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농업사회에 고유한 전통적 시장들 대신에 산업사회의 생생한 지표가 되는 상설거래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852년에 가장 큰 니제고로드 시장에서의 거래량은 5천 7백만 루블이었습니다. 이때 시장에 없었던 모스크바에서의 무역량은 6천만 루블을 초과하였습니다. 


대외 무역도 계속 성장했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통치기간 동안 대외 무역의 매년 거래액은 6700만에서 9400만 루블까지 성장했습니다. 국내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외국 상품의 품종이 바뀌었습니다. 기계와 설비, 원료 등이 더 많이 수입되기 시작했고 완제품의 수입은 감소하였습니다. 금속과 가공 제품의 전통적인 수출은 감소했고 대신에 식량의 수출량은 서서히 증가하였습니다. 빠르게 포화상태가 된 유럽의 시장에서 러시아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고 이와 동시에 해마다 아시아 시장은 확대되었습니다. 


도시들

19세기 전반에 러시아에서 도시의 수는 630개에서 1032개까지 증가했습니다. 도시 인구의 수는 2800만에서 5700만까지 증가했습니다. 수도들은 제국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주민의 수가 336,000명에서 540,000명까지 증가했던 페테르부르크와 275,000명에서 462,000명까지 증가했던 모스크바가 러시아 제국의 최대 도시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시들은 주로 국가의 변경지역과 새롭게 병합된 국토에서 세워졌습니다. 실시된 이주정책의 중요한 과업은 제국의 변경 제역 식민지화였습니다. 


시베리아에서는 북쪽 도시들보다 더 좋은 기후대에 위치한 새로 생긴 남쪽 도시들로 인구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새로운 도시들로 발전한 공장 중심지의 형성을 초래했습니다. 예를 들어 1844년에 모스크바 주의 파블라보라는 마을은 파블로스키 상공지대 도시로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모든 새로운 러시아 산업 중심지인 포볼지예, 쿠반, 스타브로폴, 우랄과 시베리아의 남쪽 지역 등에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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